박권일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인문학이 추방되고 있는 반면 소위 대중인문학에 대한 대중 적 수요는 폭발하고 있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상황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대중인문학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혹은 대학의 인문학 축출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다수의 사람들이 교양1)에 대한 어떤 특정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걸 집약한 말이 '교양의 사유화'다. 얼핏 이 말은 하나마나한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교양이란 원래 개인에 게 귀속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 말은 단순히 교양의 담지자가 개인이라는 명약관화한 사실을 강조하는 게 아니다. 교양의 사유화란 이를테면 교양이 개인의 수양론으로 환원되어버리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로 인해 교양의 공적 성격은 희미해지고, 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은 절제와 극기, 자아에 대한 위무로 대체되었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인문교양에 대한 상찬이 끓어넘치고 있다. 소위 인문학 멘토, 스타 지식인들은 각종 강연과 방송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대중은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해 돈과 시간을 기꺼이 지불한다. 좀 과장에 하자면 단군 이후 최대의 인문학 열풍이다. 한국인이 교양인이 되기 위해 이토록 노력한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시장에서 인문교양은 그 어느 때보다 긍정되고 있다. 반면 공적 교육에서 인문교양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다. 특히 청년세대에게 인문학 전공자는 루저로 인식되곤 한다.
먼저 가장 잘 알려진 인문학 멘토 중 한 사람인 철학자 강신주의 글과 말을 통해서 대중의 인문교양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려 한다. 나아가서 강신주 현상으로 상징되는 대중 인문학에 대한 전형적 비판들이 빠지는 함정도 살펴볼 것이다. 현상과 현상에 대한 비판 모두가 어떤 면에서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 그 오류가 정작 주목해야 할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논지다.
'강한 자아'
한국 대중인문학 시장을 이끄는 욕망을 읽기 위해서는 강신주라는 아이콘을 피해갈 수 없다. 철학자 강신주는 최근 수년간 소위 대중인문학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아온 스타였다. 그의 강연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의 신간은 언론 지면 목 좋은 곳을 당당히 차지해왔다. 강신주가 어느 인터뷰에서 단언한 것처럼 '50년 뒤엔 강신주만 남을 것'2)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이 강신주 인문학에 매혹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하나의 브랜드이자 사회 현상이 되었다. '강신주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대중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해왔는지를 조감해보기로 하자.3)
2012년에 강신주는 어느 글4)에서 서울역 앞 노숙자를 한 마디로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마비되어 있는 존재라 규정했다.
"자존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노숙자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마비'가 편한 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노숙자를 하나의 인격자로 깨울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순간 노숙자는 자존심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문제 삼아 강신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숙자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노숙자 개인을 비하한다는 이유있다. "잘나간다 싶더니 어김없이 맛이 가는구나" 등의 인신공격성 비난도 나왔다.
문제가 된 글은 전체적으로 중언부언하는 글이어서 얼핏 노숙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읽힌 측면이 있다. 그러나 강신주의 진의는 그런 게 아니었을 게다. 그는 글이나 강연에서 틈만 나면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야기 해왔다. 강신주 정도의 지식인이 노숙자 문제를 순전히 개인 책임으로 인식할 거라 예단하는 건 성급하다. 노숙자에 대해 그는 다른 책과 강연에서도 수차례 언급한 바 있었다.
"혹시 노숙자를 본 적이 있나요? 이 분들이 왜 거리에 나앉은 걸까요? 길거 리가 좋아서? 그럴 리는 없겠죠, 이분들은 대부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숙자를 양산하는 체계입니다."
- 강신주 외.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철수와영희, 2012, 165쪽.
강신주는 자본주의를 두고 "노숙자를 양산하는 체계"라고 말한다. 노숙자 발언으로 그를 비난했던 이들 대부분도 이 명제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노숙자를 만들어낸 사회 구조 같은 게 아니었다. 문화비평가 이택광은 강신주의 노숙자 발언이 뒤늦게 화제가 되자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본질은 '강신주가 노숙자를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말했다'가 아니다. 그의 진의가 '노숙자는 수치스럽다' 였을 리가 있겠는가. '완전한 자기의 완성'을 추구하려면 본받지 말아야 할 존재로 노숙자를 제시한 것이다."(2014. 1. 18.)
이택광의 지적은 논란 당시 나온 주장들 중에서 강신주의 의도를 가장 정확히 설명해준 것이었다.
다만 여기서 이택광이 '완전한 자기의 완성'이라 표현한 것을 '강한 자아'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강한 자아' 야말로 강신주의 글과 강연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강한 자아'는 초인을 의미하는 게 아니며, 자본주의 피라미드 꼭대기 지배계급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강한 자아는 악의와 소외로 가득 찬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자아이다. 거대한 악에 저항하는 작은 개인의 숭고성,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강한 자아'는 필연적으로 멜랑콜리한 주체가 된다. 강신주는 "성공할 거라 믿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미 너는 행복해 있다!" 등등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자기계발 강사들과 다르다. 그는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서바이벌 전문가처럼 말하길 좋아한다.
"제가 늘 강의를 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급류 같은 데 던져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떨어진 거죠. 원하지 않 지만 휩쓸리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는 거. 저는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배우고 공부합니다."
- 강신주 외,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206쪽.
살아남는 자아는 강한 자아이다. 하지만 단지 생존만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 강신주의 매력이다. 어떻게 살아남는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dignity을 지키며 살아남느냐가 관건이다. 강신주의 인문학은 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전부 수렴된다. 이른바 "돌직구"라 불리는 그의 멘토링 스타일이 나오는 것은 이 대목이다. 2014년 방영된 <힐링캠프 >라는 TV프로그램에서 어느 시청자가 "은퇴해 병들고 늙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집착하는데 너무 힘들다"고 상담을 청하자 강신주는 대뜸 "아버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를 제거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욕망에 가면을 뒤집어씌우지 말고 그것을 직시하라는이야기다. 강신주의 인문학에서 이 '돌직구를 맞는 단계는 필수적이다. 화폐로 매개된 관계, 속물적 욕망으로 더러워진 내면을 객관화시키지 않으면 윤리적 주체,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견딜 수 있는 강한 자아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나쁜 것으로서의 자본주의
자본주의라는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 강한 자아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강신주에 따르면 이건 '의지'에서 나온다. 어떤 청소년이 강연에서 이렇게 물었다. "돈이 인간관계를 매개하지만 단절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한 단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강신주는 이렇게 답한다.
"이걸 스스로 의식하고 극복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만약 친구와 나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가 끼어든다. 이것 때문에 사이가 불편해진다 싶으면 의도적으로 돈을 배제하는 겁니다. 돈 때문에 만난 친구라면 돈 말고 다른 즐거움을 찾는다거나, 돈을 매개로 한 만남 대신 인간적인 만남을 찾는다거나 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
-강신주 외,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173쪽.
화폐로 매개되는 관계의 문제가 '의지'나 '근성'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 나이브해서 되레 상쾌하게 느껴진다. 칼 마르크스, 그리고 기라성 같은 좌파들이 자신의 목숨을 깎아내며 만들어낸 수많은 텍스트가 일거에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강신주 인문학에 열광하는 팬들은 그의 파격적인 발언에 죽비 맞은 선승처럼 전율한다. 화제가 된 여러 발언들 중 압권은 소위 '냉장고 칼럼'이다. 다소 길지만 최대한 맥락을 살려 인용해보겠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 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 아닐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없애라! 한 번에 없앨 자신이 없다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 가족 건강 문제, 생태 문제, 이웃 공동체 문제, 재래시장 문제가 그만큼 해결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 "여자가 여자에게 추천하는 속이 넓은 냉장고'의 유혹, "살고 먹고 사랑하는 데 필수적인 냉장고"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는가!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 7. 21.
냉동기술의 발명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아와 질병에서 구해냈는지에 대한 인식은 강신주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냉장고 없이 신선하고 질 좋은 식자재를 그때그때 구해 먹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노동인지. 혹은 특권인지에 대한 고려도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남들과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이다. 강신주는 글이나 강연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이 얼마나 인간성을 황폐하게 하는지를 늘 강조한다.
강신주에게 자본주의는 역사적 산물이자 사회적 관계로서 생산과 축적 양식, 착취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아니다. 그에게 자본주의란 인간을 소외시키는 지폐, 공동체를 파괴하는 냉장고, 서울역 앞의 노숙자 등의 물화된 사물이다. 그리고 때로 자본주의는 기술문명이 되기도 하고, 신자유주의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질만능주의나 관료주의가 된다. 요컨대 강신주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의 그 자본주의한 우리를 둘러싼 '일상적이고 총체적인 악•고통'이다. 또한 그의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 모색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자기소외적인 현대사회의 상투성으로부터의 개인적 해방'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 불분명하고 미분화된 인식은 구조적 모순에 대한 집단적 해결이 아니라 개인적 적응전략 또는 자족적 저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실천이 강한 자아니 의지의 문제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정한 인문학'이라는 성(聖)스러운 대상
대중인문학 열풍이 워낙 거세다 보니 이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강신주를 명시적으로 거론하며 비판한 지식인으로 문강형준과 이원석이 있다. 이원석의 경우 대중인문학 유행을 비판하는 책 『인문학 페티시즘 욕망과 인문의 은밀한 만남』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들의 비판은 세부에서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큰 틀에서 정확히 동일한 이야기다. 한 마디로 작금의 대중인문학은 '진정한 인문학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원석은 대중인문학이 모종의 목적을 품기 때문에 문제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인문학의 본령, 즉 무용성이 배격되고 실용성이 표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 인문학의 유용성을 묻기 때문이다. (...) 인문학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 실용성을 추구한다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진다.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인문학이 처한 현실이다. 목적이라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이란 성공이다." - 이원석, 『인문학 페티시즘 욕망과 인문의 은밀한 만남』, 필로소피, 2015,16쪽.
성공이라는 노골적인 목표를 위해 수단이 되어버린 인문학, 대중인문학은 그렇게 타락해버리고 '상품'이 되어버린 인문학이다. 그런 인문학은 본령에서 벗어난 인문학, 사이비 인문학이다. 이원석에 따르면 인문학의 본질은 그 '무쓸모성'에 있다. 쓸모없기 때문에 다른 목적에 봉사하지 않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취급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은 특별히 새로운 건 아니다. "인문학의 무용성" "무쓸모의 쓸모'는 인문학 옹호자 들에게는 거의 클리셰처럼 애용되는 표현이다. 이원석의 결론은 명쾌하다. 우리는 "성공을 위한 수단", "문화적 액세서리"가 되어버린 가짜 인문학을 몰아내고 진정한 인문학을 추구해야 한다.
한편 문강형준은 대중인문학 강사들과 그 소비자의 행태에 초점을 맞춘다. 어려운 고전을 쉽게 전달하는 일은 고귀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대중인문학이 제대로 된 인문학 공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중인문학 강사들이 대중을 무지한 존재로 전제하기 때문에 그만큼 공부의 수준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강형준은 2014년에 발표한 어느 글에서 강신주를 거론하며 오늘날 대중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공부'가 아니며 힐링과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라 말한다.
"강사는 선생이라기보다 엔터테이너처럼, 관객은 학생이 아니라 방청객처럼 보인다. 호머의 <일리아드>를 힘들게 읽는 대신 영화 <트로이>를 즐기는 효율성, 물론 어려운 텍스트를 읽지는 못하지만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쉽게 요약 전달해주는 일은 고귀하다.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 공부'는 아니다. '공부' 는 스스로 힘들게 읽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중에게는 이런 '공부'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자체에 이며 문제가 있다."
-문강형준, "대중 인문학은 무엇의 이름인가", <한겨레> 2014. 2. 7.
"스스로 힘들게 읽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행위." 문강형준이 인문학 공부라고 인정하는 건 이런 작업이며, 이런 일을 해내는 사람이 '위대한 독학자'다.5) 즉, 진정한 인문학 공부란 엔터테인먼트화된 강연을 들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스스로 힘들게 고전을 읽고 비판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문강형준이 보기에 대중인문학 강사들이 농담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말하는 데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건 대중을 이미 무지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긴 한데, 문제는 이런 비판을 하는 그 역시 대중을 무지한 존재로 보긴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대중인문학 강사가 대중을 무시한다고 지적하던 문강형준은 결론에 이르러션 창끝을 돌려 대중의 "노예적 태도"를 질타한다.
"오늘 유행하는 '대중 인문학'은 대중의 지적 성숙을 의미하는 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위험사회를 사는 대중의 아픔과 불안의 강도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여전히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기보다는 권위를 가진 자의 강력한 손길을 기대하는 어떤 노예적 태도를 드러내는 이름이다."
그런데 대중이 노예적이어서 대중인문학을 추종한다는 이런 주장, 대중의 판단능력에 대한 저 도저한 불신이야말로 대중인문학 강사보다 더 심한 대중 비하가 아닐까? 이런 관점은 자신이 '진정한 인문학'과 '사이비 인문학'을 구분할 수 있는 주체라는 특권적 인식에서 나온다. 문강형준이 진짜 공부, 진짜 인문학이라고 인정하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앞서 언급한 이원석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인문 학이라는 성(聖)스러운 대상을 설정하고 그 반대편에 대중인문학이라는 속(俗)스러운 대상을 놓는 이러한 관점은 다분히 플라톤적이다. 근대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것이 이내 인식론적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명석 판명한 진리로 논증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특정 주체의 초월적 지위를 전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진짜○○○'과 '진정한○○ '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제 사람들이 '진정한 무엇'을 믿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일 따름이다. 물론 장삼이사가 말하는 '진짜 인문학'과 관련 학위를 가진 지식인이 말하는 '진짜 인문학'의 권위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권위가 곧 진리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명확한 것은 '진정한 인문학'이란 것에 대해 인류는 한 번도 단일한 합의에 이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인문교양을 빙자해 사실무근의 주장을 하거나 사기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이비 인문학, 가짜 인문학이 비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지적 불성실, 비도덕, 불법 등을 문제 삼으면 그만이다. 질적 수준에 대한 평가야 당연히 가능하겠으나 그들을 비판하고 단죄하는 근거가 굳이 '가짜 인문학'이니 '사이비 인문학일 필요는 없다. 교양에는 '국가공인자격'도 '원조할매집'도 없다. 종종 이상한 주장, 틀린 주장도 하지만 강신주의 강연이나 '상담'을 굳이 인문학이 아니라고 부정할 까닭은 없다.
교양의 신비화, 교양의 사유화
역사적으로 인문교양은 소수의 특권층에게 향유되던 것이었다. 대학 등 공적 교육체계에서 다수 대중에게 교양을 가르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20세기의 특정 기간이 예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어쨌든 교양교육이 차별 없이 다수에게 향유되어야 한다는 합의가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실행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20세기의 진보적 성과다. 과거 귀족과 특수계층, 그것도 남성에게만 독점되던 교양은 여성과 하층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교양을 뜻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라는 말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인문교양이 사유화되지 않고 공교육 체계를 통해 보급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평등주의적 이상의 제도화된 실천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런데 교양교육이 대중화되면서 역설적으로 인문교양의 '쇠퇴'니 '위기' 같은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이유에 대한 이런저런 분석들이 많지만, 결국 '실용성' 논리 앞에 급격히 도태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인문학과 교양의 옹호자들은 물질만능주의 효율지상주의, 신자유주의 등을 규탄하면서 우리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물질만능주의, 효율지상주의, 신자유주의가 인간적 삶을 파괴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이에 맞서 싸울 수단이자 희망이 '교양인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에는 온전히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양의 미덕이 그 정도로 큰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친 개인의 상당수는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다.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완용이 그랬고, 파시즘적 박정희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선 박종홍도 그랬다. "인문학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이 시장가치로 환산되는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어마어마한 강연료를 받고 연단에 선 강사가 말하고, 또 관객의 뜨거운 박수를 받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교양인에 대한 회의감은 더욱 배가된다.
대중인문학의 유행 속에서 교양은 지나치게 신비화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교양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영역에서는 과소평가되는 반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영역에서는 교양의 위상이 너무 과대평가되고 있다. 앞의 영역은 대학교를 포괄하는 교육 및 연구 분야이고 뒤의 영역은 일반 시민들의 생활세계다. 지금까지 인문교양이 학계에서나 일상에서나 모두 똑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인 양 가정되어왔지만 이런 전제가 과연 타당한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예를 들어 문강형준은 "진정한 공부"("위대한 독학자")를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교양이란 혼자 열심히 공부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대학 교육과정으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바로 그런 생각들이 모여 대중인문학 열풍을 떠받치는 한편, 대학에서 인문학이 추방되는 것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세태에 일조해왔다
최근 들어 점차 강의의 테크닉과 전달력에서 강점을 지닌 학원강사 출신 인문학 멘토들이 각광받고 있다. 즉, 대중인문학 시장에서도 학계 출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추세다. 그렇다면 대학에서 멸종하는 중인 인문학은 그대로 고사하게 내버려두고 대중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 스타가 된 능력 출중한 독학자들에게 한국사회의 인문교양 교육을 맡겨두면 되는 것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어쨌든 직업으로 인문학을 파고들어가는 연구자들이 존재하지 않고선 대중인문학의 질도 담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붕어빵집들은 난립하지만, 재료 공급처는 한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붕어빵을 예쁘게 만들어도 재료가 없거나 저질이라면 망할 수밖에 없다. 대학의 인문학과, 전공자와 연구자들이 바로 재료 공급처다. 학문은 동료들과 협업하고 교차 검증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아무리 뛰어난 독학자도 장기적으로는 평범한 학자들이 모인 학문 공동체의 성과를 능가할 수는 없다. 물론 학문공동체가 꼭 대학에 적을 둘 필요는 없지만, 대학을 대체할 정도로 안정적인 제도적 대안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인문학을 보존하고 지원하는 일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교양인이 되어 공동체를 선하고 정의롭게 만든다는 등의 당위론적 목표를 설정하지 않더라도 인문학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간이 공유하는 지적·정서적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로서 충분히 존재의의가 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엄격한 형식을 요구받는 '인문과학'의 형태일 수도 있고 예술적 창조와 비평의 형태일 수도 있다. 교조적으로 '교양의 무용성'을 강조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강신주 현상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가장 징후적인 부분은 강신주뿐만 아니라 그를 비판하는 이들 모두가 어떤 측면에서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강신주 인문학의 '얄팍함'을 비판하고, 혹자는 그의 강연 스타일을 문제 삼는다. 어떤 이는 인문학을 힐링이나 성공 같은 실용적 목적의 도구로 삼는다고 강신주를 비판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비판자들이 '진정한 인문학' 같은 규범적 기준을 내밀며 강신주와 대중 인문학을 비판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지점에서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교양의 사유화'다. 요컨대 교양이 개인적 실천이나 수양의 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이다.
강신주의 냉장고 칼럼'에서 가장 비판되어야 하는 지점도 이 대목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자아와 개인의 문제로 환치해버린 것, 놀랍게도 강신주의 비판자들 역시 실상 같은 이야기를 한다. "진정한 인문학", "제대로 된 공부", "위대한 독학자" 같은 표현들은 전부 개인 수양을 강조하는 말이다. 만약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가 옳고 그름에 대한 인간의 무지 때문이라면 계몽과 교육을 통해 바꾸면 된다. 그런데 정말 각자가 철저히 인문교양을 독학하면 우리가 직면한 사회 모순이 해결될까? 그럴 리 없다.
라인홀트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아무리 도덕적인 개인들이 모여 있어도 그들이 집단이 되면 비도덕적 일 수 있다고 말한다. 책임과 권한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교양인들이 모인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교양 있게 굴러가지는 않는다. 니부어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날카롭게 통찰한 사람들은 개인이 특별히 법적·도덕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거대한 구조적 부정의가 발생할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예컨대 기후변화나 글로벌한 규모로 조직된 하청산업 체계 같은 구조적 부정의는 개개인이 성인군자가 된다 할지라도 쉽게 교정될 수 없는 모순이다.
문제는 교양이 아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오래 전부터 스테레오타입화된 인문교양론을 말해왔다. 하지만 가짜 인문학, 사이비 교양이 아닌 진정한 인문교양을 요청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인문학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경험적으로 증명된 게 아닐까. 아니, 구원 같은 거창한 표현은 차치해두자. 대중이 노예적이라는 인식, '진짜 대 가짜'라는 이분법은 인문교양을 둘러싼 이 난맥을 해결하기는커녕 사태의 전모를 몽롱하게 은폐하고 있다. 특히 '대중'을 바보 취급하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갖춰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겸손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물론 그 합리성은 제한적이며 이건 지식인 전문가 역시 마찬가지다. 대중은 대중 인문학이 일종의 당의 sugar coating' 란 걸 알고 있다. 제대로 인문학을 독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있다. 알기 때문에 강신주의 강연을 듣는 것이다. 대중은 "노예"여서 강신주를 택한 게 아니라 예산제약 상황의 합리적 소비자로서 강신주를 택한 것이다.
대중인문학 열풍은 단지 인문교양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현상의 일부인 까닭이다. 구글의 광고처럼 각 개인에 적합한 상담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컨설턴트로부터 구입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연애상담, '픽업아티스트'의 헌팅요령 강의, 자기계발 멘토링이 상업적 콘텐츠로 활발하게 유통된다. 이 모든 것들은 약한 자아에 관념적 보형물을 집어넣는 수술이라는 점에서 자아성형산업 (自我成形産業)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며 남들과의 끝없는 비교에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지는 사람들은 끝없이 쏟아져나온다. 대중인문학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다양한 테라피 중 하나다. 또한 인문교양은 치료요법일 뿐 아니라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노마 필드는 이와 관련해 개인적 경험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동창생 모임에서 사업가로 활약 중인 한 여성 동창생이 시카고대학 대 학시절에 자신이 배운 인문교양 수업이 졸업 이후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 아주 유용한 비즈니스 무기가 되더라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교양 수업 때 배운 독일 사상가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이론과 지식으로 경쟁상대를 쓰러뜨렸다는 것이었다. 아도르노는 지금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과의 지도적 존재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한 철학자의 사상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사업가의 강력한 무기로 돌변한 셈이다."
- 서경식, 노마 필드,가토 슈이치. 『교양, 모든 것의 시작』, 노마드북스 2007,68쪽.
인간적 모멸의 강도가 커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강한 자아를 욕망한다. 자아성형산업은 토탈 케어 서비스다. 상처 입은 자아를 치료하고, 어루만지고, 격려하고, 때에 따라 단단한 갑옷이나 날카로운 무기를 제공해준다. 체제의 폭력이 잔혹하면 할수록 이 산업은 번창할 수밖에 없다. 체제의 착취와 억압을 견뎌내고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역량competency을 개인에게 제공하는 것. 그것이 자아성형산업의 존재 의의다. 강신주 인문학의 성공비결도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폭압에 맞서는 '강한 자아'의 서사는 체제가 붕괴하길 원하지 않지만 적당히 정의롭길 원하는 계급의 구미에 딱 맞아떨어졌다.
사실 근본 문제는 교양이나 인문학이 아니다. 문제는 구조적 부정의를 다수가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집단해법을 체념한 채 개별해법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이다. 속도전식 발전전략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불투명하고 권위주의적인 의사결정을 정당화했고, 제도와 집단해법에 대한 경험적 불신을 낳았다. 그 결과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입신출세주의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집단해법이나 숙의로 문제가 해결된 적이 지극히 드물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개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월한 스펙, 현란한 인문지식은 반대자의 입을 막고 토론을 생략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체제의 모순에 대한 대응이 개별해법에 머물고 마는 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지구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울리히 벡은 그걸 "체제 모순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해법"이라 불렀다. 사회적 위기와 위험에 대비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개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개별해법, 전기적 해법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계몽주의 신화와 결합해 '교양인 판타지'가 된다. 이 판타지는 세 개의 가설로 지탱되고 있다.
하나, 인간이 선하고 옳은 것을 배우고 싶어 한다. 또 하나, 인간은 그렇게 배운 대로 실천한다. 마지막, 그렇게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정의롭다. 이게 판타지인 이유는 이런 가설들이 그 자리에서 반박될 수 있을 정도로 허약하기 때문이다. 인문정신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찰성과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학식을 쌓는다고 자연히 생겨나는 게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야만에 맞서 정치적 책임을 다한 유일한 사례로 당시 뮌헨에 살던 숄Scholl 남매를 좁은 적이 있다.6) 이 남매는 히틀러를 '대학살자'로 표기한 전단지를 곳곳에 뿌리고 히틀러 반대운동을 공공연하게 선동하다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이들은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등의 개인적 저항을 넘어 집단행동을 조직했다. 그랬기에 아렌트에게 정치적 책임을 다했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남매의 교양 수준은 어땠을까,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 하이데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줄줄 외웠다는 아돌프 아이히만보다도 교양이 높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숄 남매는 교양이 표방하는 가치를 누구보다 완전한 형태로 실현해 보였다.
자본 바깥에 대한 상상력, 사회적 비판의식은 인문고전을 독학하면서 길러질 수도 있겠지만 노동조합 활동이나 정당 활동, 거리의 투쟁 등 정치사회적 실천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길러질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한 시급한 문제는 교양의 부족이 아니다. 집단해법의 부족이다. 기업. 종교단체가 아닌 다른 형태의 사회적 조직을 별로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고 작당(作黨)하는 것보다는 어떤 대타자를 호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은 '현자'에게 고통을 위로받고, 집단이 되면 왕(대통령)과 직접 대면하려 한다. 이도저도 아니면 인문학에 매달리거나 냉장고를 버리게 된다. 옳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물론 모두가 교양인이 되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모두가 교양인이 되지 않아도 존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황해문화》 |특집| 야만의 시대, 학문과 지성의 현주소, 2017.03
1) 개인적으로 자연과학적 교양의 부족이 인문학적 교양의 부족 이상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라 생각한다. 다만 본문에서 '교양이라 말할 때는 일단 인문교양의 의미로 제한한다.
2) 주혜진 "강신주 '날 비판하는 사람들? 50년 후엔 나만 남는다'", <북DB>, 2016, 9.7.
3) 강신주 현상에 관한 서술은 기발표된 원고를 수정하고 덧붙였다. 다음의 글을 참고할 것. 박권일, "자아성형산업 관점에서 본 강신주 현상", <미디어스>, 2014. 2. 6.
4) 강신주, "수치심은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 (중앙SUNDAY), 2012.4.7.
5) 문강형준은 이와 관련,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찰스 디킨스와 토마스 하디는 대학교를 나오지 못했지만 영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을 남겼다. 마가렛 대처의 전기에 보면 그녀의 아버지는 15살 이후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잡화상 주인이었지만 그 박식함으로 온 동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 어떤 대통령보다 똑똑하고 지혜로웠다. 대학 학위증이 없는 소설가 장정일의 그 놀라운 독서와 지식, 통찰은 어떤가. 이런 위대한 독학자가 이젠 없다." https://www.face book.com/hyongjun moon/posts/3840746952848
6)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11, 172쪽.